낮엔 숨고, 밤엔 걷는다 – 호치민 푸미흥 밤 산책기
요즘 같은 때에 호치민에서 산책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산책이요? 그 더운데요?”
응, 맞는 말이다. 낮에 걷는 건 산책이 아니라 거의 자외선 속 워킹 그릴 ㅋ
그래서 내 하루 중 가장 프리하고 마음 편한 시간은 밤 8시 이후다.
낮엔 정알 뜨겁고 땀이 흐를 정도지만, 밤에는
바람이 하루 중 가장 세게 불고, 햇빛도 사라져서 드디어 ‘걸을 만한’ 상태가 되는 시간.
밤이면 나도 걷는다.
나는 지금 호치민 7군 푸미흥에 있는 ‘스카이가든’이라는 아파트 단지 근처에서 머물고 있다.
이 아파트는 베트남 뿐만 아니라 한국, 대만, 중국, 인도 등 외국인들도 많이 사는 지역이라
치안도 좋고, 단지 자체가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어서 걷기 딱 좋다.
내 산책 루트는 단순하다.
아파트 단지 안을 천천히 한 바퀴 돌고,
그 옆에 조용한 주택가 길을 따라 한 번 더 걷는다.
이 길은 차량도 거의 없고, 오토바이도 그리 많지 않아
늦은 밤에도 꽤 안심이 된다.
가로등도 잘 켜져 있고, 중간중간 벤치도 있어서 은근히 걷기 좋은 동네다.
밤이면 사람들이 꽤 많다. 정말 많다. 집에 머물기보다, 다~ 나온 것 처럼 ㅎ
아이들은 공놀이를 하고, 노인들은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젊은이들은 상가 앞 야외 테이블에 둘러앉아 맥주 한 잔을 기울인다.
누군가는 유모차를 밀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꽂은 채로.
누군가는 혼자 걷고, 또 누군가는 조용히 둘이 걷는다.
혼자 나온 사람들도 많아
왠지 모르게 ‘함께’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 덕분에, 굳이 누군가와 얘기하지 않아도,
그냥 옆에 같은 속도로 걷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혼자 걷는 산책이 외롭지 않다.
누구 하나 튀지 않고, 누구 하나 눈에 거슬리지 않는 분위기.
서로의 시간을 조용히 존중하면서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느낌이다.
가끔은 내가 자주 가는 한국 식당의 사장님과 마주치기도 한다.
서로 눈인사를 하고 “오늘도 걷는 중이세요?” 같은 짧은 인사를 주고받는다.
말은 짧지만 그 안에 묘한 따뜻함이 있다.
멀리서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하루가 잘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스치듯 전해진다.
이국적인 도시 속에서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의외로 꽤 큰 위안이 된다.
이렇게 걸을 때는 이어폰 한 쪽만 꽂고 음악을 듣기도 하고,
어떤 날은 그냥 바람 소리만 들으며 걷는다.
하루 종일 쌓였던 피로나 생각들이
발걸음에 따라 하나씩 정리되는 기분이 든다.
누군가는 명상을 한다지만,
나에게는 이 밤 산책이 명상이다.
사실, 처음 호치민에 올 땐 이 도시가 꽤 낯설었다.
언어도 다르고, 길도 잘 모르겠고, 습한 공기에 정신도 없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밤에 걷는 이 시간이 조금씩 도시와 가까워지는 시간이 됐다.
누구와 말을 하지 않아도,
이 동네의 밤공기와 사람들 속에 섞여 걷는 것만으로
“나도 이곳의 일부구나” 싶을 때가 있다.
호치민에서의 하루가 다소 낯설고 피곤하게 느껴질 때,
나는 밤이 오기를 기다린다.
햇살이 사라지고 바람이 도는 시간,
그제서야 내가 하루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
걷는다는 건 단지 몸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마음을 느긋하게 풀어내는 일이란 걸
여기 와서 처음 알게 됐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너도 지금 어딘가 낯선 도시에서 지내고 있다면,
오늘 밤엔 잠깐이라도 걸어보길 추천할게.
혼자지만 외롭지 않은 밤,
그 길 위에서 분명 너도 나처럼
조금은 위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